순종으로 누리는 기쁨
The joy we enjoy in obedience

예수님을 내 마음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기 전에, 저는 비록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녔지만,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 밖에서 저는 우울하고, 걱정이 많고, 어둡고 소극적이고 부끄럼 잘타는 학생이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흑백으로 보였고, 고독을 즐겼고, 찬바람이 싸늘하게 옷깃을 스치는 가을을 사랑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싸구려 바바리 깃을 세워 걸치고, 종로 5가에 있었나요?  르네상스라는 오렌지 주스 한 잔에 1천원 주면,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클래식 카페에 가서, 어두컴컴한 구석에 자신을 감추고, 이해도 안되는 클래식을 폼잡고 들으면서 하루를 다 보내곤 했었습니다.

예수 밖에서는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가?   때로 정신나간 애들이 희죽 희죽 웃는데, 그렇게 얼빠지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밖에서는 웬만하면 잘 웃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웃긴 쇼를 보아도, 친구들이 우스개 소리를 해도, 매운 고추 먹고, 천연덕스럽게 별로 맵지 않다고 말하면서 으시대는 것처럼, 웬만큼 웃겨도 뭐가 웃겨 그런 식이었습니다.  자기 감정을 드러내면 무슨 저급한 인간이 되는 것처럼, 웃겨도 간신히 참아 속으로 웃고, 돌아서서 웃고, 뒀다가 웃고, 그리고 조용히 웃었습니다.  

 

그런데 ‘내 죄사함 받고 예수를 안뒤 나의 모든 것이 다 변했’습니다.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였으며, 고독한 것이 없어졌고, 어두운 곳이 싫어졌고, 바바리는 비올 때도 잘 안 입는 옷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달라졌습니다.  내 안에 기쁨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감정에 솔직해졌고, 감정이 민감해졌고, 감정이 건강해져서, 웬만하면 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웃음소리도 점점 커졌습니다.  지옥에서 출장나온 사람같은 표정이 변해서, 천국에서 소풍 나온 사람처럼 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 가장 큰 변화는 기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기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쁨은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성령님의 열매였습니다.  성령님은 내안에 기쁨을 창조하시는 분이요, 기쁨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이 달라져서, 기쁜 것이 아니라, 기쁘게 세상을 보기 때문에 기뻐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는 자신의 저서 ‘심리학의 원리’라는 책에서, ‘어떤 성격을 원한다면 이미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모든게 내가 먼저 행동하는데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쁨은 기뻐하려는 사람에게 창조되는 성령님의 열매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은 동산봄철 운동회의 날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라면, 예수 믿으면서 기쁘게 살지 않는 것은 불순종의 죄입니다.  그러나 기뻐할 일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기쁨이 창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봄철 운동회,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맑은 공기, 신선한 자연속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쁨을 만끽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샬롬.